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굽타 왕조 (문단 편집) === 문학과 예술 === 굽타 왕조 시대에 인도의 고전 문학은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는데, 왕실에 소속된 학자와 문학가들은 오랜 세월 입에서 전해 내려오던 [[설화]]를 정리하여 결과를 발표했다. 인도의 2대 서사시인 '''《[[마하바라타]]》'''와 '''《[[라마야나]]》'''가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된 것도 이때였다. 또한 문학 부분에서는 사무드라굽타가 시를 읊은 왕으로서 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. 그를 찬미한 하리세나가 지은 알라하바드 석비내용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걸작이다. 그리고 예로부터 시성으로 숭배해온 칼리다사가 4∼5세기의 교차 시기에 활약하여, 《샤쿤탈라》 등의 [[희곡]]과 [[시]]를 지었고, 또 시, 희곡, 설화문학 등의 뛰어난 작품이 출현했다. 참고로 굽타 왕조 시대에는 [[산스크리트어]]로 된 문학작품 외에 프라크리트어 혹은 [[타밀어]] 등으로도 많은 문학 작품들이 쓰여졌다.[* 물론 전체적인 양을 따져본다면 산스크리트 문학작품 수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.] 이를 통해 당시 문학은 왕실 차원에서 후원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. 보통 [[산스크리트어]]는 상류 계층들이 많이 사용했고, 프라크리트어는 하류 계층 혹은 [[자이나교|자이나교도]]들이 많이 사용했다. 실제로 굽타 왕조 시대의 프라크리트어 작품들은 대게 [[자이나교|자이나교도]]들이 쓴 것이었다. 하여간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문학작품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귀족적이고 궁중문학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. 그리고 대왕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나타내는 시를 짓게 하고 이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. 예술 분야에서는 인도의 개성이 이때 만들어졌고, 이는 아잔타 석굴 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. 여기에 있는 많은 불상과 벽화는 서양인의 모습을 한 간다라 불상과 달리 인도인의 얼굴을 닮았다. [[중국]]은 물론,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동아시아 [[불교]]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. 다만 [[힌두교]] 미술은 당시의 힌두문화의 번영과는 병행하지 못하고, 다음 시대에 들어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